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남 사건 (문단 편집) === 2차 북벌과 2차 산동출병 === ||[[파일:제남일본군.jpg]]|| ||산둥반도에 도착한 일본군.|| 1927년 9월 [[영한합작]]으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통합되었고 1928년 1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직하여 4월 7일 2차 북벌을 개시하자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장제스가 지휘하는 4개 집단군 100만 대군이 북상을 시작했다. 일본 제국은 이미 1927년 12월 20일 제남의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제남에 다시 병력을 파병할 수 있다고 결정한 바가 있으며 상하이 총영사 야다 시치타로가 장제스에게 "제남 부근에서 전투가 일어날 경우에는 출병한다. 북벌군은 제남을 피해서 지나가기 바란다. 그러나 출병해도 교전군의 작전에 관여하거나, 한쪽을 원조하는 일은 없다."고 통보한 바가 있었다. 이에 장제스는 "일본인 거류민의 보호에는 맹세코 책임을 진다. (...) 일본의 출병은 다나카 기이치와 도쿄 회담 때의 이야기와 다르다. 실로 유감이다."라며 거부했다. 결국 산동에 다시 전화가 번지자 칭다오 총영사 후지타, 제남 총영사 대리 니시다 고이치, 육군무관 사카이 소좌 등이 1928년 4월 16일 일본군의 파병을 요구하였고 4월 17일의 각의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상이 출병을 제안하고 나머지 각료들도 찬성하면서 내각은 4월 19일 산동 파병을 결정해 2차 산동출병이 이루어졌다. 4월 20일 밤 톈진에 주둔한 3개 중대 460명과 구마모토의 6사단 소속 8개 대대, 총 11개 대대 5천명의 병력이 산동에 도착하여 칭다오와 지난에 배치되었다. 이 와중에 5월 1일 오전 9시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10군 3여단을 필두로 국민당 군대가 지난에 입성하였다. 장제스는 각 부대원에게 규율 엄수를 명하는 한편 과중한 잡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전했다. 이에 지난 시민들은 성문에 국민혁명 성공 만세라는 현수막을 걸고 집집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하면서 장제스의 군대를 크게 환영하였고 국민혁명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입성했다. 5월 2일 오전 9시 산동 독판 공서에 국민혁명군은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지난엔 일본인 1800명과 일본군 23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북벌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미 사단 사령부를 지난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5월 2일 오전 11시에 일본군 6사단군 주력과 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가 지난 성 서쪽의 상업지역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국민혁명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북벌 시작 초기인 4월 10일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는 선언을 내렸으며 잘 무장된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각 부대들에게 성외의 촌락에서 일단 정지하고 [[장쭝창]] 군대와 시가전을 벌일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진격하게 하는 한편 일본군의 도발에 대해 가능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4월 21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통해 일본과 충돌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장제스는 5월 2일 지난에 직접 와서 일본영사관 무관에게 혁명군이 지난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하겠으니 일본군의 증파는 불필요하며 현재 지난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도 철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일본군 6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에게 전달되었고 5월 1일에는 국민혁명군 1집단군 소속 5군단장이 일본 총영사대리 니시다에게 일본 거류민들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